수천 년 동안 중화세계에 속했던 베트남, 아세안 가입으로 이제는 동남아세계에서 웅비

△ 아세안 가입 25년만에 아세안 의장국이 된 베트남 / 사진=아세안사무국

2020년 새해를 맞아 베트남은 아세안의 의장국이 되어 응우엔 쑨 푹 총리의 취임사와 함께 약 300명의 국내 및 대외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출정식을 가졌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아세안센터 이혁 사무총장(전 베트남대사)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었다. 베트남은 앞으로 1년간 의장국의 역할을 맡게 된다.

한국이 기구로서의 아세안에 관심을 두는 것은 중국 다음으로 교역량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인구 6억 5천만, 총교역량 2조5,748억불,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에 유럽연합(EU)이 있듯이, 동남아에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이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는 한중일, 몽고가 있지만 우리는 이런 연합체를 구성하는 일이 요원하다.

초기 아세안은 느슨한 결사체였으나 지금은 아세안 헌장, 아세안 공동체(정치안보공동체, 경제공동체, 사회문화공동체)의 비젼 등을 만들면서 지역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더욱이 아세안은 아세안+ 한.중.일, 동아시아 정상회담, 아세안 지역안보포럼 등 한중일을 제치고 동아시아 전반의 현안을 논의하는 협의체를 주도함으로써 아세안 중심성(Centrality)을 구현해가고 있다.

이와 같은 아세안에 베트남이 의장국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이 기구에 가입하는 길 자체가 순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세안 가입에 25년이 넘게 걸린 세월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 전차를 앞세워 베트남 국경을 침공하는 중국군


중국의 위협과 캄보디아의 배신이 아세안 가입의 촉매제

1967년 아세안이 처음 탄생했을 때, 베트남은 미국과 전쟁 중이어서 미국 주도의 ‘반공 군사동맹’으로서의 아세안을 경계했고 1975년 통일 후에도 베트남은 아세안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오히려 아세안을 친미로부터 이탈을 유인하려고 애썼다.

베트남은 동남아에 중국의 위협이 나타나면서부터 (1978) 아세안에 대한 종래의 입장을 선회하여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트남이 폴포트(Pol Pot)정권의 캄보디아를 침공함으로써(1978) 아세안뿐만 아니라 모든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폴포트 정권이 전통적인 인도차이나 3국의 동맹에서 이탈하여 중국으로 기울자, 베트남은 폴포트를 무너뜨리고 행 삼린(Heng Samrin)의 신정권을 세우는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했다.

나름 정당성이 있었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내정간섭으로 인식, 베트남은 하루아침에 자유 진영의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베트남으로서는 캄보디아로부터 두 번의 배신을 당했다. 첫 번은 전쟁 때 동맹자였던 폴포트가 1975년 베트남 통일 후에, 베트남의 국경을 침략한 것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두 번째는 베트남이 도와 세워진 헹 삼린 신정권이 집권 후에 내부적으로 베트남과 거리두기를 보인 것이다.

헹 삼린이 폴포트에 대한 쿠테타를 기도, 실패했을 때 그는 베트남으로 도주, 베트남에서 캄보디아 ‘민족구국통일전선’의 주석으로 취임한 후, 베트남의 지원으로 베트남군과 함께 캄보디아로 진격해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캄보디아 인민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베트남 정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의 도화선을 제공한 캄보디아의 독재자 폴 포트

캄보디아 사태로 베트남이 얻는 교훈은 캄보디아와 협력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캄보디아에 대한 인식변화가 베트남과 아세안기구를 연결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고, 나아가 베트남이 스스로 동남아시아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도록 공헌했다.

베트남은 국제적 고립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주둔해 있던 베트남 정규군을 모두 철수시켰다(1988). 

이러한 정규군의 철수는 베트남이 인도차이나 연방 결성에 대한 더 이상의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공포한 셈이었다.

이로써 베트남은 캄보디아 사태로 얽혔던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이런 결정이 단번에 나온 것은 아니다. 1981년 제3회 캄보디아 신정권이 포함된 인도차이나 3국 외무부 장관회의에서 베트남이 아세안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아세안에 미가입 국가였던 인도차이나 3국은 두 가지 목적으로 아세안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하나는 베트남이 캄보디아 문제를 양보하는 대신 아세안도 캄보디아 신정권을 포함한 인도차이나의 현 상황을 인정해달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베트남도 아세안이라는 기구를 인정함으로써 캄보디아 문제를 협의를 통해 양보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3년 동안(1988~1991) 캄보디아 문제에 관한 파리협정이 체결되었고, 이 파리협정이 이루어진 후 베트남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자세를 보여왔던 태국이 환영 의사를 표방하면서 베트남은 아세안의 수뇌들 사이에 상호 방문이 이루어지고 이미 도이 머이(doi moi) 개혁개방정책)로 아세안과 베트남과의 경제 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베트남의 아세안 가입이 현실적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뜻했다. 월중전쟁으로 불편했던 중국과의 관계도 국교 정상화로 매듭을 지은 상태이다(1991). 남은 것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 뿐이다.

그러나 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할까. 그 이듬해 중국이 제정한 남중국해에 대한 영해법이 양국관계를 급속히 냉각시키고 말았다.

베트남은 더 이상 중국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베트남의 아세안 가입은 수천 년 동안 중화세계에 속해 있던 베트남을 동남아세계로 넘겨준다는 것 뿐만 아니라 베트남이 동남아의 중국을 꿈꾸는 것을 용인하는 셈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역사학자 후루타 모토오는 그의 책, <베트남의 세계사>에서 베트남의 이러한 선택은 역사의 필연적 귀결로 보고 있다.

△ 응우엔 쑤언 푹 베트남 총리가 2019년 11월 4일, 쁘라윳 짠오차 (Prayut Chan-o-cha) 태국 총리로부터 아세안 의장국을 상징하는 의사봉을 받고 있다. / 사진=베트남업

25년의 국제사회 고립, 인고의 세월을 보낸 뒤 아세안 가입... 그리고 다시 25년만에 아세안 의장국

중국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1992), 베트남은 아세안의 옵저버 자격을 얻어냈다.

그리고 1995년에 마침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이루어내면서 역시 같은 해 베트남은 아세안이 설립된지 25년이 넘은 기간 동안 국제사회의 고립이라는 혹독한 댓가를 치루고 아세안 가입이라는 역사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그로부터 또 정확히 25년의 시간을 보낸 2020년에 비로써 아세안의 의장국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임기 1년의 의장국의 역할에 코로나로 인해 직격탄을 맞았다.

베트남은 분명 어려움에 직면해 있지만 코로나 사태를 잘 대응한 세계의 몇 안 되는 나라로서 오히려 이 어려운 시기에 의장국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잘 수행하여 베트남의 지위를 국제사회에 한층 더 알리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진단해 본다.

심상준 베트남 문화인류학 박사, 타이응웬성 소재 비엣박 대학 부총장, 한베문화교류센터 이사장, '갈대와 강철같은 두얼굴의 베트남'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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